강진 백련사 용혈암지 청자불상 출토

강진 백련사 용혈암지 청자불상 출토

2013년 03월 04일 by jeungam

    강진 백련사 용혈암지 청자불상 출토 목차

강진 백련사 용혈암지 전경

강진 백련사 용혈암지 청자불상 출토

 

백련결사의 역사적 무대이었던 전남 강진 용혈암지에서 다량의 청자 불상편이 출토돼 관심을 끌고 있다.

 

강진군은 지난 25일 전남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덕룡산에 위치한 전남도 향토문화유산 제47호인 용혈암지에서 지난 2월 7일부터 한 달간 실시한 정밀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청자 불상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고 밝혔다.

 

조사를 실시한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조사단장 한성욱)은 조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이번 조사에서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건물지 2동과 석열 3기, 용도미상의 단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건물지의 경우 조선시대 평기와와 도자기가 중심을 이루며, 고려청자는 소량 출토되었으며, 용혈 내부에서는 청자불상편이 다량 확인되었다”고 보고했다.

 

청자 불상은 이전에도 많은 수량이 출토됐으나 정식적인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된 예는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 가운데 청자불상의 경우,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용혈 내부의 트렌치 조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청자불상이 발굴조사를 통해 다량으로 확인된 사례는 용혈암이 최초로 그 학술적 의미가 매우 높다고 한다.

 

또 이번 조사에서는 건물지 2동과 석열 2기 등이 확인됐으며, 건물지 1동과 석열 2기는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청자불상의 확인은 용혈암이 종교적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유물을 통해서도 알려주고 있으며, 고품격 고려청자의 대표적 생산지인 강진지역의 청자 소비형태 등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청자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용혈암지 출토 청자불상 머리부분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은 발굴소견을 통해 “이번 조사는 축대 내부를 중심으로 한 시굴조사로 그 동안 문헌으로만 일부 알려져 왔던 용혈암의 규모와 성격 등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굴조사의 한계로 전체적인 건물의 규모와 배치는 물론 구전으로 내려오는 탑지(塔址) 등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광산 개발로 인한 채석으로 축대의 일부가 붕괴되는 등 유적이 훼손될 우려가 높고, 많은 수량의 청자불상이 확인된 용혈 내부는 그대로 방치할 경우 안전과 도굴 등의 우려가 있어 빠른 시일내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용혈암지에서 출토된 청자불상 몸통

강진 백련사의 산내 암자였던 용혈암지는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245년 4월에 원묘국사 요세가 주석했다는 기록이 있어 1245년 이전에는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혈암의 본사인 백련사는 고려시대의 불교 민중운동인 백련결사를 주도 했던 곳이며, 8국사를 배출한 고려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용혈암지는 백련사가 배출한 8명의 국사 가운데 제1세 원묘국사 요세(1163~1245년)와 제2세 정명국사 천인(1205~1248년), 제4세 진정국사 천책(1206~1294년), 제7세 진감국사 무외가 주석하면서 고려 후기 종교 민중운동인 백련결사를 주도했던 역사적인 유적이다.

 

용혈암은 동문선(東文選), 만덕사지(萬德寺志) 등 관련 역사기록에 따르면 13세기까지는 운영됐으나 조선 전기에 폐사됐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19세기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된 후 매년 용혈에 놀러갔다는 기록도 있어 폐사된 이후에도 식자들의 인식은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혈암지는 현재 터만 남아 있으며 높이 4~5m 되는 높은 축대에 동서 20m, 서북 17m의 약 330㎡에 달하는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 뒤편으로 길이 15m, 높이 2~2.5m의 동굴인 일명 '용혈(龍穴)'이 위치하고 있다.

 

4명의 국사가 주석하고 고려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백련사의 소속 암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양행선 현대불교신문 광주전남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