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행이 횡행하는 세상 자비실천만이 치유법이다

무자비행이 횡행하는 세상 자비실천만이 치유법이다

2008년 05월 19일 by jeung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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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행이 횡행하는 세상 자비실천만이 치유법이다

법정 스님, 봉축법문서 '자비 회복' 강조

법정스님법정스님이 5월12일 길상사에서 봉축법문을 하고 있다.<출처 : 미디어 붓다>

 

사람에게도 사람 먹인다면 미치지 않겠나

세상에 무자비가 설치고 있다.

법정 스님이 부처님오신날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설한 법문을 통해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자비한 현상을 강하게 질타하면서 불자들부터 자비를 실천하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법정 스님은 “소가 미친 것은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 소에게 소의 뼈와 내장을 먹인 인간들의 무자비한 행동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만일 사람에게도 사람의 시체를 먹인다면 미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수천만 마리 가금류 생매장하는 무자비 전율

법정 스님은 또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 병들지 않은 오리와 닭이 수 없이 생매장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6000만 마리가 산채로 매장됐다고 한다”며 “오늘 아침 서울시장이 서울시내에 있는 모든 가금류를 매장하겠다고 하는 뉴스를 보면서 인간의 무자비함에 전율했다”고 밝혔다.

동식물과 인간이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 회복을

법정 스님은 결국의 이런 모든 잘못된 현상들에 대한 치유는 자비와 자비의 실천에 있다며 자비가 곧 부처라고 역설했다. 스님은 “불교의 자비는 인간중심의 사랑이 아니다”라며 “세상은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계이고, 동식물 없으면 인간도 살 수 없고, 이웃이 없으면 성불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모든 생명류의 공동체 회복이 시급함을 강조했다.


<법정 스님 부처님오신날 길상사 법문 내용>

여러분 꾀꼬리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고맙게도 꾀꼬리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그렇게 훼손하고 망가뜨렸는데도, 자연은 배반을 하지 않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부처님 은혜는 생각할수록 깊습니다. 만일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지 않았다면 현재의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적어도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만난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불법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또 부처를 이루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다른 종교와 불교는 다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교주를 모시고 따를 뿐 스스로 부처가 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오직 불교에서만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부처님이 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80년 평생 위대한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은 ‘자비’입니다. 부처님은 자비를 이야기했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자비의 실천이 있었기에 불교가 종교가 된 것입니다. 자기 깨달음만 추구했다면, 추구한다면 불교는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주창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의 자비는 인간중심의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은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식물과 동물이 없다면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식물과 동물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무자비가 넘치고 있습니다. 미국 소의 광우병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소의 뼈와 내장을 먹여서 소가 미친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에선 없는 일입니다. 서양사람들이 이익 내는 데 혈안이 된데서 소가 미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사람에게도 사람의 시체를 먹게 한다면 사람도 미칠 것입니다.

요즘 조류인플루엔자(AI)로 인해, 아직 병들지 않은 오리와 닭까지 산채로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려 6000만 마리가 생매장이 됐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까 서울시장이 서울시내 모든 가금류들을 생매장시키겠다고 합니다. 무자비한 일입니다.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기계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것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런 일은 반드시 업이 됩니다. 과보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자비란 사람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도 이르는 사랑입니다.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자비경’이 있습니다. 이 경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화로운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 말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알고,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간소하게 하며, 모든 감각이 안정되고 지혜로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이런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법문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신성한 경지라 부른다.”

자비경에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자비를 발하라, 행하라, 길게 지켜라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에 다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비심이 곧 부처입니다. 살벌하고 무자비한 세상을, 사람과 동식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려면 자비를 행해야 합니다.

스리랑카에서는 결혼을 앞둔 부부가 결혼 전날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해 모시고 스님들과 함께 이 자비경을 암송합니다. 자비를 발하는 것이 이처럼 삶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자비에서 자는 함께 기뻐하는 것이고, 비는 함께 신음한다는 뜻입니다. 자비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나는 20여 년 전 인도와 스리랑카, 태국, 대만 등지를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나라를 순례하면서 나는 늘 가지고 있던 ‘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을 대만에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자비의 실천’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비의 실천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만나는 대상을 통해서 자비가 실천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 있기에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이웃은 내게 선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그때그때 마주치는 이웃을 통해서 내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웃을 만났는데도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것은 준비가 안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기도와 정진, 수행을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을 여는 준비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부처란 깨어있는 사람이란 뜻도 됩니다. 부처님은 24시간 늘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자비를 발현해서,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수행은 스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절에서나 하는 것으로, 또는 스님들만의 전유물로 착각해선 안 됩니다.

수행은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 용기와 인내와 깨어있음이 가능해집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수 없이 생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행을 하지 않아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새로워져야,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어야 성숙해지고, 눈이 열리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기량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옵니다. 등을 달고, 음악회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되풀이되는 행사를 가벼이 보아선 안 됩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행사로 보지 말고 행사를 통해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은 물론 매일매일을 늘 새날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신이 새롭게 움틀 수 있습니다. 오늘 맞는 부처님오신날은 달라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생활이 수행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거듭거듭 성숙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잠들기 전에 스스로 하루를 점검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이웃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 내 인생의 장도에 어떤 것을 축적했는가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성불하십시오.

<정리=이학종 기자> <출처 : 미디어 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