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의 눈에 비친 붓다의 리더십 목차
붓다의 가르침, 21세기 새로운 리더십 대안
순간의 집중이 인생의 집중...‘자위 결정’ 중요
‘일체유심조’로 ‘현재의 고통 벗기’ 해답 찾아
참여불교 재가연대 마이리더스 포럼의 강연자로 나선 이동연 목사.
- 강사 : 이동연(인천 한누리교회 목사)
- 주최 : 참여불교재가연대
- 일시 : 2008년 6월 3일
- 장소 : 만해NGO교육센터
목회자의 눈에 비친 붓다의 리더십은 어떤 것일까?
개신교 담임목사가 ‘참여불교 마이리더스 포럼’의 다섯 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최고마케팅 경영자 예수>를 통해 예수가 펼친 리더십을 비즈니스 관점으로 재해석했을 때만 해도 특색 없는 성직자였다. 자기 종교를 찬양하는 그저 그러한 내용이려니 미루어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을 재조명한 <리더십 불변의 법칙-왜 붓다는 인류 최고의 리더인가>의 저자임을 아는 순간 상황은 달라졌다. 그때부터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지닌 목회자’라는 수식어를 그의 이름 앞에 동반해야 할 듯 했다. 근래에 자신의 종교 밖 신앙형태를 이토록 극찬한 성직자가 있었던가?
이 날 강연회에서 이동연 목사는 “2500년 전 붓다의 가르침이야말로 21세기 새로운 리더십의 대안”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봉사와 회향의 삶을 지향하는 ‘참여불교재가연대’의 신선한 기획력이 돋보였다. 청중과 함께한 박광서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는 “종교나 사람을 각각의 주제로 하면 어려운 대화이지만 인류 공통의 문제이기에 오늘의 대화가 가능했다”고 발언했다.
저의 모태신앙은 불교입니다. 가을이 오면 할머니와 함께 내장산에 자리한 절에 다닌 기억이 납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정읍에 교회가 들어왔고 네 가지 영적 원리의 말씀과 만났습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은 최고의 복락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온 천국을 통해 ‘사람에게 닥친 한계 상황을 완전히 극복해주는 세계’를 보았고 회심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부모님 손을 잡고 절에 갔을 때는 몰랐던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지닌 절대 유일 신앙은 하나님을 통해 이뤄진다는 굳건한 믿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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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가 목회를 해보니 그 속에는 종교적인 논리만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엄청난 시장 논리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기도는 했지만 제가 그동안 믿었던 신과 현실의 신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인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가 목사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반면 오히려 불교인들에게는 은택을 입었습니다. 상당히 아이러니하죠. 저에게는 아이가 10여 년간 없었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기복주의 사상이 굉장히 강합니다. 저에게 아이가 없는 것은 일종의 ‘저주’로 통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목사에게 아이를 안주는 이유는 ‘숨겨진 죄’가 있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는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목사를 선교사로 쓰려고 아이를 주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신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철저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어온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영원불변의 진리라면 변함없는 말씀이어야 하는데 시대 따라 변화하는 성경말씀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포비아적 두려움에 신념이 무너졌습니다. 저는 공허증에 빠졌고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종교란 과연 사람의 마음을 치료해줄 수 있는가. 저의 포비아 상태가 극에 달한 와중인 결혼 11년째에 드디어 제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대단히 힘들구나. 그러나 나는 대단히 너를 사랑한다.” 교회는 헌금만 걷어갈 뿐 틀에 박힌 내용일색이었습니다. 3000년 전에 자연 속에 살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나의 현재 힘듦은 무엇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붓다의 가르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인데 반해 불교는 따름의 종교였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인데 반해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임을 알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붓다는 자신을 섬기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신이 계셔서, 완전하고, 선하고, 의롭다면 왜 세상에 악이 있는가.” 기독교는 ‘하나님이 이명박 장로를 통해서 미친 쇠고기를 수입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줬고 그 책임은 각자가 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업(業)에 의해 선한 보상과 악한 보상을 받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라고 봅니다. 불교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구원을 향해서 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은 재앙을 통한 구원입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하고많은 사람 중에 나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합니다. 선택받은 나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믿습니다. 철저히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타자를 무시하는 논리입니다.
이동연 목사의 강좌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바르게 하고 남을 이끌 수 있는 방법 즉 인류 최고의 리더 붓다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 진정한 리더가 될 것을 강연했다
# “너 자신이 되어라”
모두가 부자를 칭찬하고 추구합니다. 모두가 욕망하는 대상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말합니다. 생명 창조의 시대에 맞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의지하지 않고 너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긍정적인 자부심을 지니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출발선부터 다릅니다. ‘원죄’의 논리입니다. 오늘을 살면서 누군가를 미워했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기에 인간의 무의식은 굉장한 콤플렉스를 지닌 존재가 됩니다. 붓다는 “긍정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아름다운 생명체를 지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만의 차원이 아닙니다. 타인과의 비교는 중요치 않은 개개인의 인정을 통한 긍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등명(自燈明)ㆍ법등명(法燈明)’입니다.
싯다르타에서 붓다로 성도하는 순간이 최상의 긍정의 순간입니다. 여기서 저는 ‘내가 긍정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은 편안해졌고 내면의 힘이 생기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리더가 되려면 남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 이대로의 당신이 제일 좋습니다.” 이것이 리더의 출발입니다. 억겁의 업에 대해 긍정적인 자신이 되십시오.
# “너 자신을 강인하게 하라”
바로 바라밀(도피안)입니다. 과연 어떻게 향하는 것인가. 해답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 바로 여섯 바라밀입니다. 나에게 선을 쌓는 행위입니다. 보시를 할 때는 조건을 달지 않아야합니다. 붓다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보시는 결국 나를 위하는 것입니다. “내가 도왔으니 감사하라”고 말할 필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시를 베푸는 것이 자랑할 거리라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의 심리를 헤아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냄이 바로 보시입니다. Enjoy NOW! 바로 붓다의 말씀입니다.
저는 성직자로서 검소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직자는 세속을 버리고 궁극의 길을 가는 사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강조합니다. 왜 붓다는 제자들에게 탁발하도록 했을까요. 바로 겸손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승려는 붓다의 깨달은 내용으로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종교인 본연의 임부에 충실한 성직자는 청빈합니다. 인류 역사상 성자이면서 부자인 사람이 있었을까요? 어떤 목적인지가 중요합니다.
붓다는 과정이 이끄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과정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한 사람의 목숨이 한 숨의 순간임을 붓다는 말씀하셨습니다. 찰나에 집중하면 그 자체가 환희발심입니다. 그 자체로 나를 즐겁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의 삶을 소중히 하십시오. 심리적으로 약해지면 절대 현재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평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순간의 집중’이야말로 전인생의 집중과 같습니다. 순간에 친절하다면 전 인생이 친절해집니다.
# “다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라”
기독교에서는 내 모습 이대로 가지만 결국 변화되길 원하는 결말인 반면 불교에서는 그 모습 그대로 곱다고 말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의 긍정, 타인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라는 붓다의 말씀에 주목합니다. 현재 한국에 만연한 비하주의적인 생각을 우려합니다. 타인은 있는 그대로 존중되어야합니다. 붓다는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상처를 모두 존중하였습니다.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의 정서를 헤아릴 줄 아는 리더야말로 진정한 리더입니다. “가문을 묻지 말고, 외모를, 재산을, 이념을 묻지 말라. 천한 가문일지라도 행실이 좋으면 귀한 가문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지혜가 되는 말씀입니까.
붓다는 운명론이 아닌 현실 의지론을 설하셨습니다. 내 업장을 소멸하고 쌓는 주체는 스스로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내 결정이 내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말씀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자유 결정이 가능하도록 성장한다면 이 사회는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라고 봅니다.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따르는 책임이 주어진 주체적 인간으로 완성됩니다. 인간 속의 불성(佛性)이 바로 이것입니다. 불성이란 인류 보편적으로 내재된 선한 성격입니다. 그것을 보양시키고 양육한다면 누구나 선한 이가 될 수 있습니다.
가연숙 기자 | omflower@buddhapia.com
<현대불교신문 www.buddhapi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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