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산 관음사 재곤스님, 고해를 건너고 싶은가?…낮추고 베풀어라 목차
중추지절(仲秋之節). 황사로 인해 가을 하늘이 뿌옇다. 때 아닌 황사를 두고 뉴스는 82년만의 10월 황사란다. ‘저절로 그러한’(自然) 것이겠으나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고, 온갖 알음알이를 동원해 현상을 이해하려 애쓴다.
재곤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군산 관음사를 찾아 가는 길.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그 뒤로는 잘 익은 황금빛 벼들이 바람에 일렁인다. 먼 산에는 노랗게 빨갛게 단풍이 번지고 있다.
사실 이 모든 풍경은 그저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는 길 좌우로 펼쳐지는 수백 수천 장의 나열된 필름들. 목적지가 아니기에 다다를 수 없고, 그저 지날 수 밖에 없는 조연들.
하긴, 고속도로를 달리는 나그네에게 이런 망상은 사치에 가깝다. 안전을 이유로 높이 세운 중앙분리대는 맞은편 운전자들을 외면하게 만들었고, 억지로 풀과 나무로 꾸민 길가에는 간간이 표지판과 이동식 카메라만이 서 있을 뿐 이다. 그냥 그렇게 원래 그래서 그랬던 모습으로 구불구불 했던 시골길에서 보이던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였다면, 고속도로에서 만나는 풍경은 잘 만든 동영상 한편이 틀어진 디지털 액자와 같다.
바쁜 사람들을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시키려 만든 고속도로는 매끈한 길이 죽죽 뻗어있다. 산을 가르고, 물을 건너며 이곳과 저곳을 최단거리로 이었다. 필요하면 어디든 길이 만들어지는 통에 이제는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울’(百千萬劫難遭遇) 것이 무엇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게 흔해진 세상이다.
서울에서 군산까지 3시간 30분. 시골길은 없었다.
군산도 가을 황사와 같은 도시다. 세계에서 인구밀도 대비 교회가 가장 많은 도시. 동네마다 교회가 셀 수 없이 많다. 기네스북에 까지 올랐다는 군산에는 20만 인구에 350여 교회가 있다. 1000만 인구가 모인 서울시에 사찰이 180곳인 것을 보면 어느 수준인지 가히 짐작이 된다. 관음사는 교회가 많다는 군산에서도 더 많다는 나운동에 자리한다.
다른 곳이었다면 단박에 일주문에 들어섰을 텐데, 나그네는 그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택가 골목길을 빙빙 돌아 찾은 산허리에 자리한 관음사 주변이 남달랐다. 둘러보니 앞에 교회, 옆에 교회, 담장이 바로 붙은 뒷집마저 교회다.
관음사에 들어서니 108 지장보살상이 도량 곳곳에 서있다. 피식 웃음이 절로 난다. 누가 그랬던가, 하늘 아래 빽빽하게 교회 십자가가 많이 세워져도 하늘 향해 솟은 탑이며, 불보살상, 밤새 켜놓은 인등을 합하면 교회 십자가 수보다 절대로 적지 않다고.
좀 전까지 웃던 나그네인데 순간 당황스러웠다. 법당에서 삼배를 올리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불전함이 없다. (나중에 재곤 스님에게 직접 물어 알게 됐지만, 관음사는 ‘불전함’이라 쓰인 함 대신 공양물 올리는 그릇을 쓰고 있었다.)
“베풀라 언젠가 돌아온다”
재곤 스님은 “차나 한잔 하자”며 “선운사 있을 때 사람들이 찾아오면 도솔천 내원궁이 참 좋다며 권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는 곳은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낯설어 주저하게 되더라”며 말을 꺼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곳을 찾고,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말은 습(習)을 경계하라는 말씀이었다.
스님은 “몇일 전 김완주 전북도지사가 마시면서 ‘구스름하니 좋네요’ 했던 차”라며 차를 따랐다. 정말 구스름했다. 사람이 제 각각이라지만 보는 눈도 입맛도 같기 때문일까. ‘구스름’한 차 한 모금에 도지사와 나그네가 하나가 됐다. 이것이 자타불이(自他不二)인가보다.
잠시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려운 경제, 힘든 가정살림. 사바세계에서 고(苦) 아닌 것이 있을까마는 재곤 스님이 그 고해(苦海)를 건널 묘안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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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노스님이 ‘베풀어라. 베풀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이 나를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자들이 부처님 앞에 불공(佛供) 올린다는데, 불공드리는 것은 부처님에게 내 모자란 것 채워달라면서 내가 가진 것을 내놓는 것과 같아요. 하지만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든 주위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든) 아상(我相)을 버리고 베풀어야 합니다. 나를 버리고 하심(下心)해 상대를 존경하는 것 또한 베푸는 것이고요. 굳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도 베풀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그래서 제불공양(諸佛供養)이 중생공양(衆生供養)이요, 중생공양이 제불공양이라 했던가.
스님은 “바라지 않고 ‘나’라는 생각 없이 베품은, 벽에 공을 바로 던져 받는 것과 같다. 정면으로 던져야 공이 내게 돌아오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내게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사람은 살면서 행위를 하고, 이것이 업(業)이 된다. 매 순간의 행이 벽에 부딪히는 공처럼 똑바르게 돼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나이를 먹으니 저절로 알게 되더군요. 총명한 사람은 스스로 지혜를 갖겠지만, 우둔한 사람도 살아온 과정을 되짚어본다면 옛사람 말씀에 고개가 절로 끄떡여 집디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조사 말씀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은 물론 먼 미래에도 가르침을 주는 것이고요. 저절로 고개 끄떡여 질 때의 순간, 그것이 생활불교입니다. 부처님 말씀 어려울 것 전혀 없습니다.”
“나 좋아 하는 일에 남 업 짓게 해서야”
재곤 스님의 삶은 “아낌없이 베풀라”는 말과 하나였다. (말로만 이웃이 아닌) 정말로 옆집에 사는 이웃종교인들에게도 그러했다.
“사시사철 관음사 법당문은 닫혀있습니다. 새벽 쇳송 할 때도, 예불 때도, 법회 때도 그렇습니다.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선풍기만 틀고 기도를 올렸고요. 지난해 신도들이 도저히 안되겠다며 법당에 에어컨을 설치했어요.”
그랬다. 목탁 소리, 염불 소리가 소음이라며 민원을 넣은 이웃종교인 때문에 관음사 법당은 속 시원히 문 열고 예불 한번 모실 수 없었다. 무소의 뿔처럼 그냥 목탁을 두드리고 목청 높여 염불 할 법도 한데 스님은 그러지 않았다.
해마다 여름이면 신도들은 재곤 스님에게 읍소했다. 문 좀 열고 하면 안되냐고. 하지만 스님은 한결 같았다. 나 좋자고 하는 기도인데 남이 싫다는 짓을 해서 굳이 그 사람들에게 구업(口業) 짓게 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였다. 재가 있을 때면 “조상천도 하는 좋은 일에 (더위에 땀 흘리는)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며 다독였다.
“사바세계는 모든 곳이 고(苦) 아닙니까? 고통에서 벗어나려 수행을 하는 것이지요. 각자 자기 하려는 일만 하면 됩니다. 사실 근처에서 관음사가 제일 먼저 들어섰습니다. 지금 있는 교회며, 주택들 모두 나중에 생겨났어요. 옛날에는 혼자 살기 어려웠을 정도로 외로운 곳이었는데 하하. 하지만 좋은 곳 찾아 나도 왔는데 저들이라고 못 올 곳도 아니쟎습니까? 지금도 민원이 끊이지 않지만 나는 이곳 관음사가 좋습니다. 부처님도 계시고, (옆집에) 하나님도 계시고, 사방에 중생이 있어 모두 머무는 곳이 얼마나 좋습니까?”
재곤 스님은 세랍 72세. 속세에서도 적지 않은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전스님도 없이 지낸다. 겨울이면 무릎보다도 높이 차오르는 눈이 대웅전 계단을 덮을 새라 쓸고 또 쓸었다. 관음재일, 지장재일은 물론 조석 예불 한번 빠진 적이 없다.
“법당에 석가모니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모셨습니다. 내가 모신 분들에게, 내게 가장 가까운 분들을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관음재일, 지장재일을 빼먹지 않고 챙겼을 뿐입니다.”
가꾸는 이 있어야 예토가 정토되는 것
1978년 스님이 관음사를 일구기 시작할 때만 해도 주변에는 건물 하나 없었다. 허허벌판. 그곳에 재곤 스님은 벽돌을 쌓아 20평 남짓한 법당을 짓고 매주 어린이법회를 열었다. 35세에 선운사 주지를 사는 등 여기저기 소임에 불려 다니다 보니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이 절실히 느껴진 까닭이었다.
하지만 관음사를 창건할 때 스님은 분주했다. 상량식을 하려는데 해남 대흥사 주지를 살라는 연락이 왔다. 거절했지만 결국 재곤 스님은 대흥사 주지를 살았고, 관음사를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나운동 일대의 구역정리가 끝나 더 이상 토지를 매입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당시 관음사 근처는 논밭뿐이라 길이 험했는데도 60~70여 어린이가 법회를 찾아왔다. 스님은 법회를 찾은 어린이들에게 하나하나 통장을 만들어 주며 그들의 불심을 키웠다.
“꿈은 쉼 없이 키워야 하는데 여기저기 소임 산다고 그러지 못했습니다. 키우지 못하는 꿈은 결국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정체하면 결국 낙오하는 것인데….”
재곤 스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스님의 얼굴에는 관음사를 더 큰 도량으로 가꾸지 못한 안타까움이라고 하기엔 더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하지만 재곤 스님은 확고했다. 심지가 약한 사람이라면 이웃종교인의 억지성(?) 민원에 (관음사 창건을) 후회할 것도 같았는데 스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옥답도 누군가 개척한 사람이 있어요. 황무지를 개간하지 않은 사람은 문전옥답이 되는 황무지의 소중함을 알 수 없습니다. 전국에서 불교세가 약하다는 전북지역에서도 특히 군산은 불교의 불모지와도 같은데, ‘군산은 불교의 황무지이니까 힘들여 개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정토(淨土)는 없습니다. 예토(穢土)와 정토는 하나(같은 곳)에요.”
전북지역 군포교 일군 노장
재곤 스님은 관음사 뿐 아니라 많은 불사를 이룬 장본인이다. 선운사, 대흥사 등 큰 절 주지를 살면서 이룬 불사는 누군가라도 해야 했을 당연한 일이라며 언급조차 손사래 치는 스님.
재곤 스님은 해마다 우란분절이면 무연고 영가를 위한 천도재를 봉행해왔다. 군산 화장터에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신도들과 함께 기도를 올린 지도 오래됐다. 그중 재곤 스님의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을 꼽으라면 단연 군포교다.
이마저도 스님은 “포교를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다”라며 “늙은이에게 살아온 경험담 해달라고 해서 가는 것이고 가면 재미있어 마실 삼아 다니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9군단 법당을 비롯해 공군 제38 전투비행단 법당 등 인근 군부대 법당 불사를 이뤘다. 35사단 영내 호수인 세병호에 연등축제를 시작한 것도 스님이었다.
“사단 법당을 드나들다 보니 둥근 연못이 있어 연등 두르면 야경이 좋겠다 싶었어요. 사단장에게 말해봤는데 돌담을 쌓고 연등을 켰더니 다들 좋아하더군요.”
9군단 법당 불사도 스님의 말 한마디에 세워졌다. 당시 군단 법당은 군단 법무관들이 회의할 때면 법당 부처님이 오르락 내리락 해야 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재곤 스님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군단장 면담을 요청했다. 마침 군단장이 예전에 35사단장을 지냈던 장군이었다.
“일이 되려면 술술 됩니다. 큰일도 작은 관심에서 비롯되고요. 모든 것이 억지로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매일 5분의 참회로 ‘나’를 깨워야
재곤 스님은 “생활이 곧 수행”이라 말했다. “잘 된 것 있으면 안 되는 것 있고, 안 되는 것 있으면 잘 되는 것이 있다”는 스님의 말은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도(道)요, 수행”이라는 말로 이어졌다. 집착을 여의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자연인의 삶, 그것이 재곤 스님이 말하는 참사람이었다.
재곤 스님은 참회를 강조했다.
“잘 하고 잘못 한 것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합니까? 매일 5분씩 하루를 돌이키며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세요. 누군가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화살을 꼽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반성한다면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는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더 잘 해주게 됩니다.”
스님은 수련을 좋아한다. 피운 꽃이 인연이 다해서 질 때도 낙화 없이 물속으로 조용히 들어가 잠기기 때문이다. 재곤 스님은 “오고 감이 없이 깨끗한 수련처럼 회향을 잘 해야 한다”며 “선운사 석상마을에 ‘승려노후수행관’이 지어지면 그곳에 머물 예정”이라고 말했다. 스님이 처음 출가했던 선운사로.
나그네는 재곤 스님의 법문을 보고 듣고 가져왔다.(我今聞見得受持) 부처님 말씀이 어려울 것 하나 없다는 스님의 쉽고도 쉬운 말씀, “매 순간 열심히 살고, 참회하라”는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願解如來眞實意) 순간 황사 개인 가을 하늘이 청명하기만 했다.
재곤(在坤) 스님은 1937년 공주에서 출생했다. 1964년 선운사에서 남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6년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1968년 동화사 강원을 졸업했다. 이후 문경 봉암사, 공주 마곡사 선원 등에서 안거를 했다. 고창 선운사 주지를 비롯해 조계종 감찰부장·규정부장 등을 지냈다. 조계종 9ㆍ10대 종회의원, 종정 사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스님은 1984년부터는 군산교도소 지도위원과 9군단, 35사단 등 군포교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 왔다. 1988년 전북불교총연합회장, 군산불교사암연합회장 등을 맡아 전북불교 활성화에 앞장선 스님은 지금도 전북지역 포교 일선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대불교신문 글=조동섭 기자 ㆍ사진=박재완 기자 | 기사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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