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스님의 심우장 성역화로 민족주체성 회복하자"

“만해 스님의 심우장 성역화로 민족주체성 회복하자"

2008년 09월 01일 by jeungam

    “만해 스님의 심우장 성역화로 민족주체성 회복하자" 목차

동방대학원대 백원기 교수, <동방논집>서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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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심우장 전경. 백원기 교수는 동방논집 제2집에서 심우장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이 화마에 소실된 후 문화재관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다. 총체적 점검을 통해 문화재 정체성 확립, 체계적 보존관리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는 때, 민족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일본 강점에 맞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실천했던 서울 성북동 소재 만해 스님의 심우장(서울기념물 제7호)을 성역화해 민족 주체성 회복 공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백원기 교수(동방대학원대)는 <동방논집> 제2집에 기고한 ‘심우장의 정체성 확립과 보존관리방안에 대한 연구’에서 “만해 스님의 연구가 문학적 측면에 집중됐다”고 전제하고, “만해 스님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는 것이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어 생을 마감한 심우장을 민족문화 창달의 공간으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우장(尋牛莊)은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치기 위한 집’이란 뜻이다. 선학원 벽산 김적음 스님이 초당을 지으려 마련한 북장골 송림(松林) 중 52평에 후학동지들이 52평을 더해 100여평 공간에 지어졌다. 만해 스님은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떻게 불 땐 방에서 편히 살겠느냐”며 심우장 냉돌 위에서 입적했다.

백 교수는 “북향집 심우장 차가운 방에서 꼿꼿하게 앉아 지낸 만해에게 ‘저울추’라는 별명도 있었다. 차디 찬 냉돌에 앉아 혁명과 선의 세계를 끝없이 더듬는 저울추”라고 설명했다.

백원기 교수는 “만해 스님이 떠난 지 64년 된 지금도 성북동 심우장에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일제 강점기 동안 자유와 평등을 대의로 실천한 만해가 1933~1944년까지 말년을 보낸 민족자존의 정체성을 간직한 공간이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보존돼야할 심우장이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오자 만해 스님 자손인 한영숙씨가 “꼴 보기 싫다”며, 이사갔다. 지금은 1999년 서울시가 심우장을 매입해 성북구청 관리인이 거주 중이다.

백 교수는 “주변 고려 없이 세워진 기념비와 시멘트 건물, 찢어진 비닐장판ㆍ탁구대와 삽 등이 널부러져 멸실ㆍ훼손 위기에 처해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개방시간조차 일정치 않아 방문했던 시민들이 닫힌 문틈 사이로 보이는 흉물스런 건물만 보고 되돌아서는 것도 예사고, 경보장비 및 방화시스템 없이 소화기 몇 개가 전부”라 지적했다.

백원기 교수는 2007년 12월경 만난 성북구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지자체 의원들이 가시적 공사를 통한 주민 시선끌기에 집중할 뿐, 문화재 관련 예산 배정에 소홀하다”고 비판했다.

2005년 12월 서울시가 발표한 ‘비전2015, 문화도시 서울’ 계획에 맞게 ‘심우장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백 교수는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심우장 관리운영과 보존을 위해 동방대학원대 총장, 성북구청장, 성북문화원장 등이 모여 ‘심우장 성역화 사업’ 추진을 위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동방대학원대가 만해 스님과 심우장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성북구 등이 예산 집행 등 행정업무를 담당하자는 내용이다.

백원기 교수는 ▲심우장 주변 정비 ▲심우장 내 만해 흉상 및 시비 건립 ▲만해 추모 문화행사 개최 ▲심우장 관련 학술대회 개최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심우장 홍보 ▲인근 사찰 템플스테이와 연계한 문화재답사 프로그램 운영 등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다.

백 교수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옛 것을 찾아 보존하고 현대적이며 창의적인 의미로 활용하고 만들어 나가는 일이 문화창달의 중요한 요소”라며, “심우장 성역화 사업과 함께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시민운동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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