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둔산 안심사 - 인고의 세월 견뎌 중생 마음 어루만지는 곳 목차
지난해 9월 10년 불사 끝에 복원된 대웅보전. 이곳은 과거 〈명찰순례기〉에 658판의 한글경판이 있다고 전해질 정도로 수많은 경전과 보물들이 보관된 곳이었다.
인고의 세월 견뎌 중생 마음 어루만지는 곳 대둔산 안심사
신라 선덕여왕 7년(638) 자장율사 창건
조선시대까지 간경도감 설치 사찰
지난해 9월 10년만에 대웅보전 복원 완공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옷깃을 스치는 바람결이 제법 쌀쌀하다. 절 아래 매화는 흐드러지게 피워 상춘객을 맞지만 아직 이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찾아보기 어렵다.
충청도와 전라도를 함께 아우르며 높게 서있는 대둔산 서쪽 안심사는 대둔산 끝자락의 품에 온화하게 안겨있는 사찰이다. 굳이 좌청룡, 우백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큼은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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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는 꽃이 있어 향기로운 계절 봄날에 찾아야 제격이다. 절에 이르는 길을 가다보면 벚꽃, 개나리, 진달래, 배꽃들이 탐방객을 반겨주지만 아직은 일러 봄꽃은 보이지 않는다. 길가 큰 바위에 세워진 ‘대둔산 안심사’라는 표식을 보고 작은 시골길로 접어들었지만 안심사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4km남짓 더 가야 일주문을 만날 수 있다. 전형적인 농촌마을. 시골길은 포장이 잘되어 있지만 좁아 교행에 주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마을이 대둔산 군립공원지역에 속해 건축등 개발에 제한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쁘고 아름다운 전원주택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끝자락에서 안심사 일주문이 당당한 자태를 드러낸다. 이곳에서도 언덕길을 한참 올라야 절 마당에 당도할 수 있다.
대웅전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 모습
열반성지 안심입명처로 유명해
안심사는 신라 선덕여왕 7년(서기638)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안심사 사적기에 기록되어있다.
안심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삼칠일을 기도하던 중 부처님이 나타나 ‘열반성지 안심입명처’로 가라는 말을 듣고 이곳에서 정진 중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 절 이름을 안심사라 했다고 전한다. 실제 안심사 절 앞마당에서 바라본 앞산 능선의 모습은 영락없는 부처님의 열반상과 닮아있다.
그 뒤 헌강왕 7년(서기875)에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고, 신라 말기 조구(祖球)화상에 의해 재중창 되었다. 그 후 고려를 거쳐 조선조 선조34년(서기 1601) 수천화상이 네 번째 중창을 했으며, 숙종 39년(서기1710) 신열선백에 의해 다섯 번째 중창을 했다고 전한다. 안심사는 조선시대까지 간경도감이 설치됐던 사찰로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있었던 거대한 사찰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원각경〉 〈법화경〉 〈한글언해본〉을 비롯해 수많은 경판이 보관돼 있던 판전을 비롯한 전각 일부가 소실됐다. 그 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군 8사단 88연대 3대대가 작전상의 이유로 ‘징발중 소각’ 처리했다.
소각 이전까지 대웅보전 2층에 남은 경판본과 추가 제작된 경판이 보관돼 있다가 이마저도 대웅보전과 함께 소각됐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1931년 7월호 〈삼천리〉잡지에 기고한 ‘국보(國寶)에 잠긴 안심사’에서 안심사에 한글 경판이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유숙하며 당시의 감상을 적은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 만해 스님은 안심사에 전각 30여채 암자 12곳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만해 스님은 또 ‘명찰순례기’에서 안심사 대웅보전에는 658판의 한글 경판이 있다고 그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대웅보전은 현 주지 일연 스님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후 소각된 지 65년만인 2015년 9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10년만의 불사 끝에 복원했다. 현재 복원된 대웅보전에는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 여래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부처님 치아사리와 의습 10벌이 봉안된 금강계단
부처님 치아사리와 의습 봉안된 곳
안심사에는 매우 귀한 보물이 과거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보물1434호 안심사 금강계단에는 부처님 치아사리1과와 의습 10벌이 봉안되어 있다. 1759년 조성한 안심사 금강계단은 넓은 기단을 형성한 석조계단 중앙의 석종형 부도(높이 176cm)와 4구의 신장상(높이 110~133cm)이 자리잡고 있다.
석조계단 면석의 연화문과 격자문양등의 조각은 장식성과 섬세함이 부각되어 매우 우수한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고, 신장상의 조각도 갑옷과 신체의 세부표현이 매우 세련되고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고 있다. 금강계단 아래에는 임시 가건물이 들어서 참배객들과 기도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대웅보전이 복원되기 전까지 주법당으로 사용되던 적광전에는 안심사 동종이 봉안돼 있다. 안심사 동종은 일제강점기 공출을 피해 금산 보석사로 옮겨져 있다. 60년 만인 지난 2004년 안심사로 되돌아왔다.
현재 안심사에는 대웅보전 외에 적광전, 삼성각, 산신각, 육화당의 전각과 요사채 건물이 남아있다. 작은 개울건너 삼성각은 무지개 다리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보이지만 현재는 기와 번와 공사가 진행 중이다.
적광전 위쪽에 자리잡은 산신각에서 내려보는 풍광은 산 아래 마을은 물론 앞산과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싼 대둔산을 감상하기 좋은 전망 포인트이기도 하다. 안심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안심사 사적기는 현재 농지의 한가운데 자연석 위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효종10년(1658년) 당시 안심사 주지 처능화상의 청으로 우의정 김석주가 글을 지었고, 글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홍계희가 썼고 대둔산 안심사비라는 전서는 영의정 유탁기가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효종 당시 처능화상의 청으로 당대 석학들이 만든 사적기
비문은 4면에 고루 새겼으며, 기록된 내용을 통해 이 절에는 대웅전과 약사전을 비롯한 30여 채의 건물과, 석대암 문수전 등의 12개의 암자가 딸려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비에는 총탄 자국이 여럿 남아 있어 한국전쟁 당시 이곳이 격전지였음을 말해준다. 절 아래 일주문 옆에는 이름모를 부도 여러기가 자리하고 있어 이 절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하다. 부도의 주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의 마모가 심한 이들 부도군은 대부분 온전한 모습이 아닌 상태로 남아 있다.
이렇듯 안심사는 병화의 아픔을 간직하며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고 이제 비로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그 옛날 30채 이르는 전각과 12암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웅보전의 복원만으로도 힘든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안심임명처임에 분명하다. <조동제 현대불교신문 전북지사장>
대둔산 군립공원에 속해 절과 일주문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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