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주 태조암, 시간이 멈춰버린 암자에는 수행가풍만이 목차
시간이 멈춰버린 수행도량 완주 태조암
태조암(太祖庵)은 지금은 위봉산이라 불리는 주출산의 정상인 되실봉(524m) 아래 전주시내와 드넓은 호남평야를 굽어보며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되실봉을 중심으로 위봉사쪽에 비가 내리면 위봉폭포로 흘러가고 태조암쪽에 내리는 비는 송광사앞으로 흘러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태조암이 창건된 것은 1675년 위봉산성이 축성될 때 함께 건립됐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전주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경묘의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피신시키기 위해 쌓은 위봉산성안의 행궁과 함께 태조암도 창건됐다.
실제 조선말(1894년)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나 전주부성이 농민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어진과 위패가 태조암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산자락 아래의 위봉사를 에두르는 산줄기 전체가 성곽을 이루고 있다.
위봉산성은 거의 허물어져 일부를 제외하고 돌무더기로 남아있고 행궁은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태조암만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건당시는 행궁의 수호사찰로 창건됐지만 지금은 비구니 선원을 운영하고 있는 위봉사의 산내암자로 오롯이 수행가풍을 이어가고 있다.
태조암 가는 길은 위봉산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적 없는 길을 오르다보면 마치 산성을 지키던 병사가 튀어나올것만 같다.
송광사방면에서 휘돌아 굽이도는 3km 정도 뱁재(위봉재)를 정상의 위봉산성부터 태조암 오르는 길이 시작된다.
송광사 방면에서 오르는 고갯길은 뱁재지만 위봉사 방면에서 오르는 길은 무주령(無主嶺)이다. 주인없는 고갯길이란 뜻이다. 같은 고갯길이 두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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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정상에 올라 원형이 남아있는 위봉산성 서문 앞 길가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임도를 따라 30분을 걸어 올라야 한다.
이정표는 0.97km를 알려주고 있지만 몸이 느끼는 체감거리는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암자를 오르는 길은 걸어야 제격이다. 그저 하늘을 뒤덮는 울창한 숲이 이끄는 대로 걸어 올라야 제 맛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인적없는 울창한 숲 그늘 산성길을 홀로 걷다보면 어디선가 불쑥 옛 병졸이 퇴어나올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옛날 전란에 대비해 쌓은 성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태조암을 오르자 사람은 없고 수백년은 족히 되어보이는 느티나무가 객을 반겨준다.
장마철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고 도착한 태조암은 전주시내가 한눈에 들어 올 정도로 멋진 조망을 안겨준다.
태조암은 대웅전인 법당(法堂)과 요사채가 붙어있는 인법당(人法堂) 한채인 단촐한 구조다.
천상 수행자가 아니면 이곳에 오래 머물기도 어려울 듯 하다.
태조암은 그야말로 깊은 산속 작은 암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태조암과 관련해서 19세기 말경에 태조암에서 여섯분의 스님들이 극락정토 만다라(만불탱화)를 조성했는데, 탱화가 조성될 당시에 태조암쪽 산마루가 온통 탱화에서 방광(放光)하는 빛으로 싸여 마을 사람들은 산불이 난 걸로 착각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 극락정토 만다라는 서방정토 극락세계 9천500명의 아미타여래를 표현한 불화이다. 현재는 위봉사에 봉안되어 있는데 8폭만이 남아있다.
태조암은 현 조계종의 전신인 조선불교 초대교정(현 종정)을 지낸 영호(박한영)스님의 출가사찰이기도 하다.
완주 삼례출신의 영호스님은 불심깊은 스님의 어머니가 위봉사에서 금산스님의 생사법문을 전해주자 이에 감명을 받아 19세에 금산스님을 찾아 태조암으로 출가했다.
<조동제 현대불교신문 전북지사장>
태조암 가는 길
■대중교통: 전주대∼수만리 행 106번 버스(하루 6회운행 막차 수만리행 20:00, 전주행 21:40) 전주 시내버스(063)272-8102
■자가용: 호남고속도 익산JC∼익산 장수간 고속도로~ 741번 지방도(송광사. 위봉사), 혹은 익산∼비봉(741지방도)∼고산∼동상(호반 드라이브)
<주변 둘러볼만 한 곳>
■ 위봉산성 (사적 471호)
전북 완주의 위봉산(524m)에는 유사시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조선조 숙종 때에 축성된 위봉산성이 있는데, 산자락 아래의 위봉사를 에두르는 산줄기 전체가 성곽을 이루고 있다.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원년(1675)~숙종 8년(1682)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 둘레는 약 8,539m, 성벽 높이는 1.8~2.6m, 성 안 면적은 1백66만여㎡에 이른다.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성벽 및 성문, 포루, 여장, 총안, 암문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위봉폭포
위봉산성이 동문쪽에 있는 위봉폭포는 높이가 60m이며, 2단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옛부터 완산 8경에 드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폭포주변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가까운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을 기념하는 웅치전적지 (전라북도기념물 제25호)가 있다.
■ 위봉사
위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 말사이다. 백제 무왕 5년인 604년 서암대사가 창건, 1359년(공민왕 8)에 나옹선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의 규모는 28동이었고 암자도 10동이나 되는 대가람이었다. 1911년에는 선교31본산의 하나로 전라북도 일원의 46개 사찰을 관할하였으나,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지금은 그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다.
1990년에 위봉선원을 짓고 삼성각을 보수하였다. 1991년에는 나한전을 중건하고 일주문을 세웠다. 1994년에는 극락전을 건립하여 아미타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2000년에는 범종각을 지었다. 조선말에 건축한 요사채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됐다.
■ 송광사
송광사는 도의선사가 절터를 찾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터를 잡았는데 그때가 신라 진평왕 5년(583)이었다. 그후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서 중창되었다.
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大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었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한지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덕림스님을 중창주로 모시고 복원·중창하게 되었다
■ 대아 수목원 063)243-1951
산림휴양, 산림문화공간, 자연환경, 식물종의 다양성 확보를 바탕으로 산림자원 조성을 목적으로 1995년 개원했다.
155ha의 면적에 금낭화 자생군락지와 산림문화전시관, 산림생태체험관, 분재원등을 갖추고 있다.
산책로와 임도를 따라 올라볼수 있는 3개의 전망대가 위치하고 있어 어린이, 청소년들의 자연체험 학습장으로 손색이 없다. 입장료 : 무료
맛집
■ 순두부 마을
송광사에서 741번국도 진안방면으로 자동차로 5분거리에 순두부 마을이 있다.
대부분 원조 간판을 달고 있지만 진안방면으로 오른편 신호등 앞 집이 원조로 알려져 있다.
■ 이안 메추리 063)243-7400)
741번국도 전주방면으로 가다보면 이안메추리 간판이 보인다.
주인이 메추리 농장을 직접 하면서 키운 다양한 메추리 요리가 준비되어 있다.
숙박 : 송광사에서 위봉사를 지나는 도로가에 많은 팬션과 숙박시설이 있다.
<조동제 현대불교신문 전북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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