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 스님, 영108인 강연 “맞선 볼 때 슬리퍼 신고 나가라”

법륜 스님, 영108인 강연 “맞선 볼 때 슬리퍼 신고 나가라”

2011년 11월 13일 by jeungam

    법륜 스님, 영108인 강연 “맞선 볼 때 슬리퍼 신고 나가라” 목차

법륜스님

법륜 스님, 영108인 강연 “맞선 볼 때 슬리퍼 신고 나가라”

 

▲ 고뇌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평화재단 이사장 법륜 스님

법륜 스님(평화재단 이사장)이 불교여성개발원(원장 김애주) 영108 젊은 불자들을 위한 강연에 나섰다. 법륜 스님은 11월 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공연장에서 진행한 ‘영108과 법륜 스님의 신(新)나게 혼(魂)나는 여행-법륜스님 불교청년에게 한소리 하다’에서 고뇌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스님은 젊은 불자들의 모임인 영 108 회원들과 대중들을 위해 대담과 즉문즉설을 통해 청년들이 나아가야 할 수행 방향과 자세, 마음가짐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대담의 요지이다.


서용근(영108 회원): 불교가 좋은 건 알겠는데 청년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막연히 불교가 좋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법륜 스님: 불교 뿐 아니라 기성 종교들도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자체를 별로 중요시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비상식적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높은 진리는 고사하고 상식적인 전도 수준은 돼야 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종교의식ㆍ교리ㆍ행동이 상식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 계시던 시절을 보면 부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지 나이든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부처님 시절에 방황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남ㆍ여 30명이 짝을 맞춰서 야외로 놀러갔는데 한 사람이 여자 친구가 없어서 유녀(遊女)를 데리고 갔다. 다들 술 마시고 놀다 취해서 쓰러져 잤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그 유녀가 패물을 모두 챙겨서 도망갔다. 젊은이들은 여자를 잡으러 가다가 부처님을 만났다. 젊은이들이 “여기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못 봤습니까?”하자 부처님은 “왜 그러느냐?” 했다. 이어 젊은이들이 “그 여자가 우리 패물을 가지고 도망갔다”고 하자 부처님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것이 중요한가. 잃어버린 패물을 찾는 것이 중요한가”라고 말했다. 이 말에 젊은이들은 단박에 깨달음을 얻고 출가를 했다.

그 당시 사회적 변환기에 방황하는 청년들이 쾌락에 젖어 있을 때 새로운 가치와 희망을 준 사람이 부처님이었다. 그 당시 종교인 브라만교는 관념적이고 권위적으로 변질 돼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호감을 주지 못했다. 반면 불교는 젊은이들에게 획기적인 호응을 얻어 수많은 출가자들을 배출했다.

불교는 현재 방식으로는 젊은이들에게 호감을 얻기 어렵다. 기성정치권은 여ㆍ야, 진보ㆍ보수로 나뉘어 싸우는데 젊은이들에게는 그들 모두가 자신들에게 무관심한 기성세대일 뿐이다. 젊은이들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기성세대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발상자체가 달라야 청년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불교든 다른 종교든 부처님처럼 젊은이들의 문제에 새로이 접근해야 한다.

이미선(영108 회원): 4년간 연구생활만 하면서 스트레스도 받고 그랬다. 그러다 영108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불교 쪽에서 젊은 불자들의 놀이터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법륜 스님: 어릴 때 교회에 가면 찬송가도 배우고 연극도 한다. 이것은 개신교적 가치라기보다는 테크닉의 문제이다. 불교에서 이런 방식의 포교를 할 것이라면 테크닉의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테크닉을 통한 선교로 형성된 개신교 세력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 바람직한 행동을 하는지 봐야 한다. 어떤 가치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만 명이 모인 세력이 때로는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가 있다. 나는 개신교의 이러한 문제가 사회의 큰 장애요소이며 나아가 개신교가 쇠퇴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테크닉에 너무 빠지면 안 된다. 젊은이들에게 소통의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고뇌와 짐을 불교를 통해 내려놓거나, 마음의 상처를 부처님 가르침으로 치유하는 등 장기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를 불교가 갖고 있어야 한다.

젊은이들은 만남을 좋아한다. 만남 속에서 교훈을 얻고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환경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 불교청년끼리 또는 다른 분야의 청년들끼리 만남의 계기를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해야 한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교류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젊을 때는 경험을 많이 쌓고 견문을 넓히는 것이 좋다. 청년 시절에 한군데 매달리기보다 다른 청년들과 교류하며 국제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청년 운동을 활성화 시키면 좋을 것이다.

서용근: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명상을 할수록 행복해지고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경험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데 쉽게 잘 안 따라온다.

법륜 스님: 내가 좋다고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참 좋은데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인연을 맺어주는데 실패하게 된다. 그 사람이 어떤 문제로 고뇌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무엇을 하자” 이런 것 보다 먼저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보면 무슨 문제로 고민하는가를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나도 그런 고민이 있어서 이런 경험(명상이든 불교공부이든)을 했더니 참 좋더라” 등 자기 경험을 통해 상대에게 신뢰를 쌓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들어주는 것. 두 번째는 공감해주는 것. 세 번째는 내 경험을 나눠주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명상을 통해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체질적으로 들떠있기 때문에 거부반응도 일으킨다. 그럴 때는 절을 하면 좋다. 약간 다리가 아프지만 자기가 조금만 참으면 할 수 있다. 땀도 나고 운동한 맛도 나고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절은 자신을 낮추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이렇게 접근하기 쉬운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명상을 불교적 가르침에 맞게 지도해야지 명상이란 이름으로 외도들의 명상, 예를 들면 복식호흡, 요가를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효과적이어도 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다.

명상의 첫째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는 것, 두 번째는 어느 한 곳에 집중하는 것, 세 번째는 그 상태에 깨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편안하면 졸리고 깨어있으면 긴장하게 되면서 편안함을 놓치게 된다. 처음에는 이러한 모순을 겪지만 계속 하다보면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는 걸 잘 조절하면 집중력도 좋아지고 인간관계에서도 화를 줄이게 된다. 이렇듯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면서 ‘아 이게 나한테 좋은 것이구나’를 알면서 이끌어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불교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차근차근 노력하고 저축해서 돈을 모아 부자가 되겠다는 성실한 태도가 아닌 복권 당첨과 같은 욕심을 부린다. 단박에 깨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욕망이다. 욕망을 내려놔야 해탈로 가는데 깨달음이 욕망과 결합이 될 때 수행이 힘들어지고 지친다. 그리고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절망하게 된다. 수행을 이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수행을 하면 좋다”고 권유하기 보다는 내가 겪은 바를 이야기 하면서 안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선: 영108회원 중 명상을 열심히 하는 동생이 있는데 할 때는 마음이 편하고 좋은데 현실로 돌아오면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법륜 스님: 첫 째는 선원에 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이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는 일상 속에서도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호흡을 하고 알아차리는 연습을 열심히 하면 일상 속에서 화가 날 때 자기가 화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자기도 모를 때 화를 내버렸으면 ‘아 내가 화를 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주의를 해야 한다.

수행을 하는데 ‘난 왜 안 돼지?’ 라는 생각을 하면 자기 학대, 비하가 생긴다. 넘어지면 넘어졌구나 생각해야지. ‘왜 난 자꾸 넘어 졌나’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넘어지면 다만 일어나고 앞으로 갈 뿐이지 주저앉아서 넘어진 것을 한탄하면 안 된다. 이게 수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가져야할 원칙이다. 앉아서 명상센터에서 편안해졌으면 그걸로 좋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앞에 주어진 상황이 수행의 대상이 돼야 한다. 앉아서 호흡을 할 때는 호흡만 관찰하고, 상대와 대화를 할 때는 대화에 깨어있고 운전할 때는 운전에 깨어있는 것처럼 매 순간 깨어서 현재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화할 때 자기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은 망상을 하는 것이다. 주로 수행하는 사람은 그게 잘못됐다. 명상센터나 참선하는 데서 수행 법문할 때 한번 잘 살펴보자. 수행자들은 법문자를 쳐다보면서 법문에 귀를 집중해야 하는데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서 귀만 열어놓고 있다. 이렇게 되면 화자와 청자가 호흡이 잘 안 맞게 된다. 수행자가 법문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파악하고 같이 호흡을 맞춰 나가야 되는데 대부분은 “너는 얘기해라. 나는 명상한다” 이런 식이다. 그럴 때 바로 명상이 잘 못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호흡을 하다 호흡을 놓치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고 법문을 듣다 놓치면 다시 법문에 돌아오는 것이 수행이다. 그럴 때 수행이 생활과 일치 한다는 것이다.

 

법륜스님 영108인 강연

▲ 법륜 스님은 젊은 불자들의 모임인 영 108 회원들과 대중들을 위해 대담과 즉문즉설을 통해 청년들이 나아가야 할 수행 방향과 자세, 마음가짐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용근: 매 순간 깨어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일상생활에서 순간에 집중하기가 잘 진행이 안 된다. 수행이 부족한 것인가?

법륜 스님: 회사에서 부장이 업무를 지시하면 지시에 깨어있어야 하고 야단을 치면 야단에 깨어있어야 한다. 내가 깨어있을 때는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여러분이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누군가와 싸울 때 그 상태를 지나고 나면 후회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때 깨어있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깨어있으면 지금 가장 잘 할 수 있다. 우리가 대화에 깨어있다면 그때 대답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당시 상태에서는 대답을 잘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 이렇게 대답할 걸’이라고 후회한다.

 

멋있게 말하려고 하거나 잘 보이려고 하거나 다른 곳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에 적절한 내 수준에서 이야기를 못한 것이다. 항상 그 상태에 깨어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된다. 안되면 다시 알아차리고 다시 깨어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내 이야기를 들을 때 ‘집중해야지’ 하는 건 집중이 안 되고 있다는 뜻이다. ‘집중해야지’ 하는 건 번뇌다. ‘~해야지’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번뇌지.

명상할 때 중요한 것 세 가지가 있다. 정정(正定, 고요함), 정명(正命, 뚜렷이 깨어있어야 함), 이 두 가지가 핵심이고 마지막으로 정정진(正精進)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꾸 놓치게 된다. 놓치면 다시 다시해라. 또 놓치면 다시해라. 그것이 정진이라는 의미다. 놓쳤을 때는 놓친걸 알아차리고 다만 그렇게 할 뿐이고 돌아가면 된다. ‘왜 난 놓쳤지’ 하게 되면 번뇌다. 잘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은 “왜 안 되지?”라고 한다. 안 되는게 정상 아닌가요? 피아노를 처음 치는 사람이 ‘왜 피아노가 안쳐지지’하는 이런 생각은 공짜로 먹겠다는 것이다. 계속 연습해야 한다. 놓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 게 아니다. 놓지 못한 자기를 알아차리고 그냥 놓으면 된다.

 

우리가 뜨거운 것을 쥐고 있으면 ‘앗 뜨거워!’하고 놔버린다. 옆에서 친구가 “그거 어떻게 놨어?” 하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안 놓아진다는 것이다. 왜 안 놓아지는가. 첫째, 뜨거운 줄 모르는 것이다. 인생이 고(苦)인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고인 줄 아는 것이 공부의 첫 번째다. 이 사실을 알면 그냥 놓을 수 있다. 뜨겁다 하면서 움켜쥐고 있는 것은 놓는 방법을 몰라서 안 놓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기 때문에 놓지 않는 것이다. 놓기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쥐고 있으면 손이 데인다. 그렇게 되면 싫어도 놔야 한다. “싫어도 어떻게 놓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덜 뜨겁던지, 갖고 싶은 욕망이 강하던지 둘 중 하나다. 이것을 자꾸 연습해야 체험이 된다.

 

공부할 때는 이렇게 단순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공부를 자꾸 분별하고 머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을 안보고 번뇌를 따르기 때문에 공부하는데 혼선이 생긴다.

 

서용근: 짝을 찾으려는 젊은이들이 영108에도 많다. 인연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 속에 상(相)을 정해놔서 찾느라 그런 것인지.

 

법륜 스님: 길거리에 온갖 여자 남자가 있는데 짝이 없다는 것은 눈이 높아서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 선을 볼 때 중매자가 상대방의 조건을 살짝 속기로 했다. 고졸인데 전문대 나왔다고 하고 전문대 나왔으면 4년제 나왔다고 하고. 서로들 조금씩 자신의 조건을 높이고 속이니까 막상 살아보면 내 기대치와 다르기 때문에 신혼 초에 갈등을 겪는다. 그래서 진짜 결혼하고 나서 행복해지려면 짝을 만났을 때 화장을 다 지우고 나가고, 평소에 높은 구두를 신고 나갔으면 슬리퍼 신고 나가고 좋은 옷 대신 평범한 옷 입고 나가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서로가 맞출 수 있다. 그러다가 결혼할 때 예식장에서 신부가 화장한 모습을 보고 ‘우리 마누라 화장하니 억수로 이쁘네!’ ‘우리 신랑 멋지네!’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신혼 생활이 좋다. 여러분들이 상대의 기준을 높여서 찾는 것이 불행의 원인이 된다.

 

서용근: 아는 누나가 남자 보는 눈이 높았는데 결국 그렇게 고르고 골랐는데 “결국 그놈이 그놈이더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법륜 스님: 맞는 사람이 어딨나. 맞춰야지. 맞추기 어려우면 나같이 혼자 살던지 해야 한다.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성격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닌데 만약에 결혼했으면 내가 고치든지 괴로워하든지 둘 중 하나다. 자기 성격이 원래 이런 줄 알면 거기에 맞게 살면 된다.

 

내가 스님으로서는 괜찮은 성격인데 결혼해서는 절대로 좋은 성격은 아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사적인 여유로움은 전혀 없는데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나. 하지만 스님으로서는 존경을 받는다. 다 자기 기질에 맞게 사는 것이다. 자기의 카르마를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 성질대로 하면서 같이 살겠다. 내가 예쁜 여자와 결혼하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맙시다. 반드시 예쁜 사람은 예쁜 값을 하고 돈 많은 사람은 돈값을 한다.

 

한 남자가 어떤 여자를 3년 동안 따라다녀서 결혼을 하게 됐다. 남자는 목표가 달성 됐기 때문에 보상심리가 생겨 결혼 후 행동이 돌변하기도 한다. 여기서 여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여자가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일 때 ‘저렇게 나에게 매달렸으니 내가 결혼 후에는 다 진 빚을 다 갚아야 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승낙해야 하는데 ‘저 정도로 나한테 매달리니 결혼하면 편하겠다’하고 승낙하면 오산이다. 자기 밖에 생각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자기 자신은 중생심으로 살면서 상대는 항상 보살도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내가 중생이듯 상대도 중생이다. 내가 한눈팔 수 있다면 상대도 한눈팔 수 있다. 그것을 서로 인정하면 문제를 삼지 않고 수용해서 잘 넘어갈 수 있다.

 

사랑의 핵심요소는 ‘이해’라고 생각한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이다. 성추행이 뭡니까? 내가 좋다고 상대를 껴안는데 상대는 내가 싫다고 한다. 상대는 괴로워한다. 이게 폭력이다. 대부분 여러분들이 말하는 사랑에는 폭력적인 것이 많다. 자기가 좋으면 상대방 배려 없이 자기 좋은 대로만 한다. 그것을 사랑이라 표현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집착’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 이해가 기초가 돼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이미선: 상대가 한 눈 팔라는 것을 이해하라는 것은 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 떠나는 것이니까 끝내야 하는 거 아닌가?

 

법륜 스님: 왜 아이가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는지 아는가?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안받아주고 그걸 억압하기 때문에 아이는 거짓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1 여학생인 딸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이때 딸이 엄마한테 가서 미주알 고주알 얘기할 때 엄마는 딸이 지켜야할 선만 정해놓고 다 들어주면서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딸은 엄마에게 다 털어놓고 이야기 하게 되고 엄마는 딸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이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면서 딸을 억압하면 딸은 다음부터 엄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아이가 위험한 선을 넘어 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 남자친구가 “그 여자 참 괜찮더라”하면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억압하면 남자친구는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 하지 않게 된다. 그럼 사고가 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남자가 여자 친구 이상으로 다른 여성을 좋아한다고 한다면 그때는 상대에 대한 배려로 남자친구의 행복을 위해 가라고 해야 한다. 여자가 거기서 기분이 나빠서 탁 안 좋게 끊어버리면 지난 만나온 시간들이 손실이 되는 것이다. 낭비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행동도 좋은 선택이라 여기고 미워하면 안된다. 미워하면 지난 만나온 기간이 다 손실로 돼버려 무의미한 만남이 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실제로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 되는 것이 현실이고 중생이니까 손실을 보는 것이다. 그것을 되는 쪽으로 목표를 놓고 자기 마음을 돌이키고 그쪽으로 가야 자기 손실을 보지 않는다.

 

결혼하기 전에 세 명의 남자를 사귀었는데 모두 실패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한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는데 연습이라 생각하면 굉장히 좋은 경험이 된다. 옛날에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나의 든든한 후원 세력이 되는 것이다. 왜 귀중한 재산을 낭비합니까. 돈만 재산이 아니다. 우리가 맺어진 인연이 다 귀중한 재산이다. 회사에서 퇴사할 때도 다 재산이다. 인간관계를 나쁘게 하면 자기 손실이다. 그런 것을 지혜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 불법공부를 하는 것이다.

 

연애할 때 일어나는 마음의 질투심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랬을 때 마음에 왜 이런 작용이 일어나고 괴로움이 되는지, 늘 내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보면서 원리를 터득하고 괴로움은 줄이고 즐거움을 증장시키는 것이 수행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수행 안할 이유가 뭐 있나. 이렇게 좋은 것을.

 

서용근: 불자들과 영108 회원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법륜 스님: 대한민국에 문제가 많다. 그래서 불평과 좌절이 많다. 하지만 “빈민국이나 오지에가서 살래? 한국에서 살래”하고 물으면 한국에서 살 거 아닌가. 그러니까 대한민국 살만하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살만한 나라다. 난 거기에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불교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굉장히 많은 모순들을 볼 것이다. 그래도 다른 종교와 비교해보면 나은 면이 있다. 그래서 불교가 좋은 것이다. 자꾸 불교를 비판하다보면 좋은 점을 모른다. 자기가 놓여있는 현실에 대해 긍정해야 한다.

남편이 매일 술 마시고 들어와 힘들다고 하는 보살이 있다. 내가 그 보살에게 “술 마시는 남편 죽고 없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면 보살은 “죽으면 안되죠”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그럼 남편이 가끔 술 마시고 뻗어서 뒤치다꺼리 하는 게 낫습니까, 아니면 중풍에 걸려서 매일 병간호를 하는 게 낫습니까?”하고 묻는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면서 보살에게 도달한 것은 ‘우리 남편 술 마시는 거 괜찮네’ 하는 것을 자각시키는 것이다.

‘우리남편 문제야, 나쁜 놈이야’ 이것은 상(想)이다. ‘그 사람은 술을 마신다’라는 하나의 행위만 있을 뿐이지 그 행위가 좋고 나쁜 것도 아니다. 이게 비상(非想)이다. 공(空)이다. 이것을 자각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

앉아서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다 만 번 설명하고 해봤자 인생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생활 속에서 터득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지금 바뀌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스스로 경험을 해야 한다. 법의 가피를 입어야 한다.

만약 내가 아팠는데 어떤 약을 먹고 나았다. 지금 누가 그 병으로 아프다. 그럴 때 우리는 “이거 한번 해봐라. 이거 한번 먹어봐라. 어디 수련 가봐라”고 권하게 된다. 자기가 그 문제를 풀었기 때문이다. 전법(傳法)이 금방 되는 것이다. 신뢰가 가기 때문에 상대에게 퍼지는 파급효과가 크다.

그래서 ‘내 눈 뜨기’를 먼저 해야 한다. 세상, 가족, 남편, 자식 이야기 하지 말고 그 속의 내가 먼저 눈을 떠야 한다. 그러면 바로 지금의 내 삶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법에 대한 가피를 입는 건 여러분 자신을 위한 길이고 전법의 가장 기본이다. 이게 있어야 전법의 파워가 나온다.

그래서 내 눈 뜨기를 먼저 해야 한다. 세상, 가족, 남편, 자식얘기 하지 말고 그 속의 내가 먼저 눈뜨면 좋다. 바로 지금 내 삶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수행을 먼저 해야 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를 대면 안 된다. 남편이 어떻고 절이 어떻고, 스님이 어떻고 이런 얘기 하면 안 된다. 자기를 먼저 봐야 한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다. 우리는 첫 구절만 알지 두 번째 구절은 잘 모른다. 두 번째 구절의 뜻은 “삼계(천상계ㆍ인간계ㆍ지옥계)가 모두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뜻이다. 이것을 대승불교가 정리 한 것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고 성불과 정토이다.

때문에 이 정토의 길 즉, 아름다운 세상, 보다 나은 세상 만들기는 불교가 해야 할 본질적인 과제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교의 본질적 문제에서 벗어났다. 불교가 2500년 동안 사회적인 지도력을 상실하고 천시 받으면서 결국에는 절름발이가 됐다. 이게 우리가 역사 속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이건 ‘정통불교’가 아닌 ‘전통불교’이다. 우리는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정통이 아니다. 왜곡된 불교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번째 구절을 복원해야 한다. 그런데 불교는 첫 번째 구절도 제대로 안 돼 있다.

여러분들은 수행을 해서 스스로가 우선 좋아야 한다. 스스로가 먼저 가피를 받고 난 뒤 ‘이 세상에 불법이 전파돼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져야 돼’ 하는 것이 전법이다.

그런데 불자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연 없는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들도 극락에 가야한다.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데리고 가야한다. 이것이 보살사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개선해야 한다.

우리사회가 민족적으로 볼 때 먼저 개선해야할 것이 평화 정착과 통일 문제다. 우리가 해결해야할 문제다. ‘나는 수행하기 때문에…’ 이건 말이 안 된다. 수행은 하면서 하는 거다.

환경문제를 위해 활동하고 극빈층을 보호해야한다. 북한아이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누구와 같이 할 수 있을까. 개신교인들과 같이 할 수 있다. 어른들과 같이 할 수 있다. ‘기성세대들은 자기 생활에 빠져서 안주한다’라는 생각은 중생심에 사로잡힌 것이고 젊은이들이 이런 현실에서 자라지만 진흙에서 연꽃을 피우듯이 이걸 딛고 전체 이익을 위해 각성해야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불교 신행활동도 하고 또 연애도 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고 그런다면 사회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가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하게 된다. 비불자들은 불교의 발전보다는 불교인이 우리사회의 민주화 변혁 통일 평화 등 사회 발전에 어떻게 기여 하는지를 중요시 여긴다.

그러니까 불교 이미지 제고가 아닌 지구촌 모두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을 하면 결과적으로 불교이미지가 개선되고 포교는 자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요새는 상품소개보다 회사 브랜드 이미지만 가지고 광고하는 시대다. 하나하나 포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가 갖는 사회적 이미지를 개선하면 엄청난 사람들에게 불교의 인연을 맺는 토대를 마련해줄 것이다.

# 법륜 스님과 함께 하는 즉문즉설

즉문1: 개신교가 불교에 대한 문화를 훼손하는 문제가 많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법륜 스님: 봉은사 땅밟기는 일종의 주거침입에 해당한다. 법적으로 분명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니 이에 대해 대응을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얼마 전 문제 됐던 템플스테이 예산삭감도 마찬가지이다. 전통 사찰과 문화재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국가가 국가 예산을 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불교의 원칙은 상대가 칼을 휘두른다고 나도 칼을 들고 막는 것이 아니라 피 흘리고 쓰러지는 것이다. 국민의 권리를 주장해 이들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하는 것도 좋지만 이건 한 이익집단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비불자들에게는 공감을 얻지 못한다. 불교를 넘어선 전체 이익을 위해 힘쓴다면 이미지가 개선되고 불교가 사회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다. 가령 템플스테이 예산 삭감만 얘기하지 말고 장애인 예산삭감도 함께 얘기할 수 있다면 좀 더 불교 이상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즉문2: 세계적 불교 인구는 늘고 있는데 한국 청년 불자는 감소추세이다. 청년회를 이끌면서 법사 스님과 시스템은 한정돼 있어 많은 답답함을 느낀다.

법륜 스님: 기독교 문명이 만들어 놓은 현대문명의 폐해를 불교가 해결할 수 있다. 불교는 아쇼카시대, 당나라에 이어 제3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불교에 호시절이 왔다. 그러니 한국불교는 한국 문제의 해결을 넘어서 세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의 장점은 많다. 지도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스스로 시작해야 한다. 불교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스님이 아니라 여러분이다. 불교모임은 친목단체가 아니다. 다른 재미있는 모임이 생기면 그것으로 가게 돼 있다. 수행을 바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 그것을 사회로 확대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현대불교신문 이나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