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 스님 강연 - ‘붓다의 시대적 조명’

법륜 스님 강연 - ‘붓다의 시대적 조명’

2012년 05월 22일 by jeungam

    법륜 스님 강연 - ‘붓다의 시대적 조명’ 목차

“붓다의 삶을 내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법륜 스님 강연 - ‘붓다의 시대적 조명’

 

2천 6백년 전 우리 곁에 오셨던 붓다는 시대의 모순을 바로잡고자 했던 위대한 사상가요 혁명가였다. 불교의 위기라고 말하는 요즘, 붓다의 자취를 통해 불교의 시대적 사명을 돌이켜 보는 자리가 있었다. 5월 12일 조계사에서 열린 법륜 스님(평화재단 이사장)의 구국구세 강연 ‘붓다의 시대적 조명’. 종이거울자주보기운동본부(지도법사 송암ㆍ도피안사 주지)가 주최한 이 강연에서 스님은 부처님의 실천적 사상을 현 사회에 비추어 강연해 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정리=정혜숙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왜 불교를 믿으려 하는가 붓다는 누구인가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공부하여 불교관 정립 돼야 불교신자 될 수 있어요”

 

 

제가 고 1 때 절에 들어와서 살았어요. 불교의 합리성 과학성 이런 것이 어린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줬고 불교의 역사성에 굉장한 자부심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꼈던 게 불교의 사회성 문제입니다. 70년대 독재 도시 빈민의 고통, 노동자들의 어려움, 농촌의 붕괴, 청년 학생들의 아우성 이런 것에 대해서 불교는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있었어요. 이후 광주민주화운동, 10·27 법난 이런 큰 사건을 겪었는데 당시 불교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불교를 좋아했던 저는 처음으로 불교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 나이 서른이 넘어 미국으로 갔습니다. (출가 전의 꿈이었던) 천문학자 공부를 늦게나마 해보고자 했습니다. 그즈음 만난 서암 스님께서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해주셨죠.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라네. 그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

 

저는 큰 충격을 받고 불법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발심해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역사와 사회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간 한 인간으로서 부처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어떤 고뇌를 했는가 등을 생각하며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글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공부를 하니 신 같은 존재의 붓다가 아니라 구체적 현실과 역사 속에서 살아간 청년 붓다를 볼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삶의 지침이 될 나의 스승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의문을 가져보라고 합니다. 첫째 ‘왜 불교를 공부하고 믿으려고 하는가’입니다. 불자가 되었을 때 내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삼보와 오계로 삼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참회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두 번째, 도대체 붓다라는 분이 누구냐,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 살아간 그분의 삶이 무엇인지 점검해야 됩니다. 2천 6백년이 지난 지금 인도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붓다의 구체적 인격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실천 수행자라면 나의 삶 나의 말 행위에 있어 그분의 삶이 지침이 되어야겠죠.

 

그다음으로는 불교의 근본가르침을 정리하고 불교의 역사를 알아야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오늘 나에게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변질되기도 하고 개혁되기도 하잖아요. 결국 이런 공부를 하고 내가 불교인이 될 거냐 안 될 거냐를 결정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붓다의 인격에 감동을 해서 그 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자세가 되어 있고 불교관이 정립 되었을 때 불교 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부처님 생전에 역사적 상황을 생각해볼까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브라만은 우주의 근본이었어요. 카스트 제도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 거였죠. 그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계급에 따라 살아야 했어요. 부처님은 여기에 의문을 제기했어요. 세상을 창조한 주인 브라만은 없다. 계급 부정 체제 부정을 통해 기존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거예요. 붓다께서는 근본적인 인간의 사유를 뒤집어버렸죠. 붓다야말로 그 어떤 혁명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혁명가였기에 홀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또 부처님은 남녀 차별도 부정을 하셨어요. 여성 수행자를 인정하신 거죠. 아직도 가톨릭에서 수녀가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비구니가 인정이 된 거에요.

 

지금은 당연시 되는 것들이지만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지 못하면 출가를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 집 나가고 가족 떠난다고 출가가 아니에요. 정신적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거예요. 초견성을 해서 길을 확연히 알아야 해요. 봉사가 눈 뜨듯이 탁 깨달아야 해요. 붓다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은 사람이에요. 지금 돌아봐도 붓다의 삶은 흠집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는 물질문명이 지배하고 있잖아요. 절집도 월급 받고 공양주가 밥해주고 불 때주고 해주잖아요. 이런 사회적 한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반성을 해야 합니다. 불교가 사회적 세력을 얻기 위해서 정치 권력과 결탁하고 사회 시설 몇 개 짓고 이런 걸로는 안 됩니다. 문명의 혁명을 해야 합니다. 소비 문명을 뛰어넘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기본 관점이 중요합니다. 현실에서는 현실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굶어죽는 사람 살려야 하고 전쟁도 막아야 됩니다. 또 물질에서 자유로워져야 붓다에 귀의할 수 있습니다. 나무 밑에 자고 버려진 옷 입고 걸식을 했던 붓다의 삶에 걸맞는 이 시대의 검소한 삶의 자세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실력도 안 되는 자식 명문대 보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혹여나 그렇게 기도를 해서 실력도 안 되는 자식이 명문대에 간다면 부처님은 입시 브로커가 되어야 합니다. 입시 브로커를 믿는 게 신앙입니까?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붓다는 이런 붓다일 겁니다. 다들 신앙을 믿는 게 아니라 입시 브로커를 믿고 있는 거죠. 이래가지고는 신앙이니 실천이니 이런 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자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모순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아난존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래가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큰 공덕을 지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죠. “아난다여. 세상에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과 같은 것이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병든 자에게 치료할 약을 주는 것,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을 돕는 것,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덕을 짓는 기준은 이렇게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붓다께서 2천 6백년 전에 하신 말씀이지만 이것이 가장 앞선 언어입니다. 왜 부처님이 계급을 부정하고 창녀 5백명을 출가시키고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출가시켜 세상의 비난을 받았습니까? 부처님은 바른 법을 가지고 살아가셨습니다. 민중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보살의 마음을 가지셨던 겁니다.

 

수행을 위해 속세를 떠났다는 이유로 세상 고통 외면하면 소승은 돼도 대승은 안 됩니다. 세상 속에 있어도 그것에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사람은 성인 보살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세상을 정화하는 그래서 세상의 때를 닦아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불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세상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 수행을 철저히 해야합니다. 수행자는 온전히 자신을 간직하고 가는 힘이 있어야 하니까요.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해도 거기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작든 크든 언제나 세상이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대승입니다.

 

 

질문 있습니다

어떻게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까?

 

우리나라는 민주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었죠. 하지만 이것이 분단된 상태의 발전이다 보니 큰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공동의 번영을 위해서 통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중의 싸움에 휘말리면 100년 동안 통일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이와 반대로 통일이 되어 미중의 세력 균형자 역할을 하면 우리가 평화의 상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평화가 주변국의 평화, 우리의 이익이 주변국의 이익이 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세계정세를 잘 읽을 수 있는 안목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한국 불교가 세계화 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한국 불교는 현대화 세속화 되어 있습니다. 수행이 근본이 되어 내공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야 합니다. 남 비난하지 말고 소박하게 자기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현 불교는 조선 시대 500년 동안 억압당했던 불교를 100년 만에 빠르게 회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외형적 형식적 성공이죠. 이제는 담마에 귀의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불교 전체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